[박해성의 여의대교] 민주당의 호남 공천 시스템, 이대로 괜찮나
- 작성일2024/01/03 09:40
- 조회 60
21세기에도 '호남 푸대접', 누가 시키고 있나?
칼럼을 쓴다고 해서 공당(公黨)의 운영을 두고 어떻게 하라 마라 할 일은 아니지만, '좋은 정치'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의 경선제도와 호남 정치입니다.
지난 202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광주광역시, 전라북도, 전라남도 등 호남권 3개 광역시·도의 당선자는 모두 스물여덟 명입니다. 이중 광주 8석, 전북 9석, 전남 10석 등 27석을 더불어민주당이 석권했습니다. 전북의 남원·임실·순창 선거구에서만 국민의당 출신인 무소속 이용호 후보가 당선됐는데, 민주당에 복당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습니다만 이듬해 국민의힘에 입당해 지금은 여당 국회의원입니다.
민주당은 전국정당입니다. 우리나라의 정당법은 제3조에서 '정당은 수도에 소재하는 중앙당과 특별시·광역시·도에 각각 소재하는 시·도당으로 구성한다'는 요건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어 제17조에서는 '정당은 5 이상의 시·도당을 가져야 한다'고 규정, 지역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의 창당을 사실상 제한하고 있습니다.
다만 영·호남을 중심으로 특정 정당 몰표 선거가 반복되는 등 지역주의가 현상적으로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여기에는 과거 정치적 목적으로 조성된 영남과 호남의 지역 차별과 갈등이 표심을 통해 반복적으로 표출되고, 결국 극단적 진영으로 나뉘어 고착화한 역사적 과정이 있습니다. 2000년대 들어와 지역감정의 완화를 기대하게 만든 선거 결과도 있었습니다만, 여전히 영·호남 지역의 보편적 투표 기준이 후보자의 소속 정당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전국정당이 일부 공고한 지역 기반을 갖는 건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닙니다. 미국의 경우만 보아도 캘리포니아, 뉴욕, 일리노이, 매사추세츠, 워싱턴 등 매번 민주당이 승리하는 주, 앨라배마, 오클라호마, 아이다호, 몬태나, 노스다코타 등 매번 공화당이 승리하는 주가 있습니다. 일관된 지지 경향이 없는 주들은 경합 주(swing states)라고 부릅니다. 플로리다,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 미시간 등이 여기 해당합니다.
미국의 정치비평가나 학자, 언론인들은 이른바 '파란 주(민주당)', '빨간 주(공화당)'들의 존재에 대해 몇 가지 우려를 표합니다. '선거 때 정당의 관심이 늘 경합 주에 집중되므로 파란·빨간 주 유권자의 관심사와 문제는 캠페인에서 소외된다', '경쟁이 없어 지방정부의 질이 저하되고 공직자가 좋은 성과를 낼 동기가 줄어든다', '혁신이 저해되고 정치가 유권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게으르게 만든다' 이런 것들입니다. 어떤가요? 우리 정치에 바로 대입해도 어색하지 않죠?
호남 시민들의 정치의식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입니다. 지나온 선거 결과들을 살펴보면 좋은 정치를 갖기 위한 유권자들의 노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국회의원이나 광역단체장 선거보다 투표의 정치적 부담이 덜한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는 무소속을 후보자를 선택함으로써 민주당에 경고를 보내는 일이 흔한 편입니다. 지난 2022년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전국의 기초단체장 중 무소속은 17명이었는데, 이 중 10명이 호남권에서 나왔습니다. 2018년에는 무소속 17명 중 7명이 호남이었고, 2012년에는 29명 중 15명이었습니다.
한편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진보 성향의 제3당이 선택지가 됩니다. 2016년 국민의당 녹색 돌풍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2020년 총선에서는 그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민생당 소속으로 출마한 거물급 중진 의원들이 참패했습니다. 광주의 장병완·박주선·천정배·김동철, 전북의 정동영·조배숙·유성엽, 전남의 박지원 전 의원 등이 대표적입니다. 민생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정치인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보수진영 바른미래당 계열과의 합종연횡, 끊임없는 계파 갈등으로 호남 시민들의 기대를 짓밟은 호남 기반 제3정당을 심판한 것이죠.
결과적으로 초선 의원들이 대거 당선되었습니다. 호남 국회의원 28명 중 17명에 달합니다. 비율로 보면 60.7%로, 여야 경쟁이 치열한 서울의 36.7%(총 49명 중 초선 18명)와 비교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선거 결과를 지켜보며 새로운 인물들의 등장으로 호남 정치의 변화를 기대해볼 만한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개인적인 기대를 해보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21대 국회의원의 임기는 불과 8개월여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다음 선거를 준비해야 할 시점입니다. 호남은 '경선 승리 = 당선'의 공식이 통하는 곳이니만큼 현역 의원이나 도전자나 경선에 사활을 겁니다. 그런데 그 준비라는 게 말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로 귀결됩니다. 권리당원의 모집, 조직관리, 동원입니다.
민주당은 당헌 제98조에서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 후보자의 경선 방법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권리당원의 투표·조사결과는 100분의 50 이하, 권리당원이 아닌 유권자의 투표·조사결과는 100분의 50 이상으로 반영한다'라는 것입니다. 민주당은 이 비율을 5:5로 적용해오고 있습니다. 당원과 일반 유권자의 의견을 반반씩 반영해 후보자를 선출한다니, 일견 합리적인 방식으로 느껴집니다.
여기서 몇 가지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가겠습니다. 일단 권리당원 외 50%의 비중을 차지하는 일반유권자는 세부규칙상 '민주당 지지층 또는 무당층'으로 자격이 제한됩니다. 무당층의 참여는 드문 일이라 핵심 지지층을 대상으로 한 경선이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일반 유권자 경선은 일반적 여론조사가 아니라 투표입니다. 정해진 규모의 안심번호를 추출('안심번호 선거인단'이라고 부릅니다)해 ARS를 몇 차례 발송하고, 참여하는 모든 민주당 지지층·무당층에 투표권을 주는 방식입니다. 여론조사와 비교하면 놀랄 정도로 응답률이 높습니다. 거의 모든 후보자가 조직을 동원해 전화 대기를 시키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경쟁이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 과열된다는 점입니다. 경선이 본선과 다름없는 호남 정치인들의 관심사는 A부터 Z까지 권리당원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현역의원들이 노심초사하는 국회의원 평가에도 권리당원의 여론조사가 포함되죠. 다른 데 신경 쓸 여력도, 필요도 없습니다. 권리당원 조직을 장악한 국회의원이 지방선거 공천을 무기로 후보자들을 줄 세우거나 경선에 개입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고 합니다.
한번 상상해 봅시다. 만약 내가 사는 지역의 국회의원을 뽑는데 정당의 당원과 핵심 지지자들의 투표로만 결정한다면, 정치인들이 나 같은 일반 시민들의 삶에 일말의 관심이나 가질까요?
네, 그래서 피해는 고스란히 호남 유권자의 몫이 됩니다. 주민의 삶을 개선한다거나 일자리를 만든다거나 서민 경제를 활성화하는 것 같은 지역 정치 본연의 일들이 후 순위로 밀리니까요. 정책을 만들고 비전을 제시하는 데 공을 들일 필요도 없겠죠. '호남 푸대접'이 박정희 정부에서 시작되었을지언정, 정작 지금 호남을 정치적으로 소외시키는 건 민주당 경선제도의 왜곡과 조직선거에 온전히 기대는 낡은 정치 행태가 아닐까요.
과거 민주당은 몇 가지 정치 실험의 경험이 있습니다. 배심원제 경선이라든지 공론조사를 통한 야권후보 단일화 등이 대표적입니다. 유권자들에게 인물을 충분히 알린 후 판단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였습니다. 공정성을 장담할 수 없다거나 후보자들이 승복하기 어렵고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사라지고 말았죠. 관리의 부담을 피하고 보다 간편한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는 현실론이 유권자를 위한 최선의 후보자를 공천해야 한다는 정당의 본질적 역할론을 압도하고 있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정답이 있는 문제는 아닐 겁니다만, 적어도 호남의 특수성을 고려한 공천 제도가 필요해 보입니다. 호남 정치인들이 시민과 지역사회를 위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면 좋겠습니다. 그게 바로 민생을 챙기고, 서민과 중산층의 삶을 돌보며, 좋은 정치를 만들겠다는 민주당의 초심과도 일치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네이버에서 보시려면,
https://n.news.naver.com/mnews/hotissue/article/002/0002302378?type=series&cid=200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