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의 여의대교] 그래도 비례대표제 확대가 옳다
- 작성일2023/11/16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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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대표 확대'에 스스로 재 뿌리는 비례 국회의원들
우리나라에서 국회의원이 되고자 한다면 두 가지 경로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지역구 선거에 출마하거나, 비례대표 의원으로 선출되는 것입니다.
현재 총 298명인 제21대 국회의 지역구 의원은 251명이고, 비례대표 의원은 47명입니다. 이런 선거제도를 '혼합형'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방식입니다만, OECD 38개 회원국 중 우리나라처럼 혼합형 선거제도를 가진 나라는 일본, 독일, 뉴질랜드, 이탈리아 등 8개국에 불과합니다.
지역구 국회의원만을 선출하는 나라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6개국으로 더 적습니다. 나머지 24개국은 비례대표제만을 채택합니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스위스, 네델란드 등이 여기 해당합니다.
비례대표제의 가장 큰 장점은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의 의견 분포가 국회 의석에 최대한 반영되는 것입니다. 소선거구제에서는 필연적으로 다수의 사표(死票)가 발생하는데, 이로 인한 대표성의 불균형을 보완하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깁니다. 지역구 의석이 의원정수의 84%나 되는 우리 현실로 볼 때, 비례대표제가 승자독식의 문제를 어느 정도나 해소할 수 있는 걸까요? 혼합형 선거제도를 채택한 다른 나라들의 의석 비율은 어떤 수준일까요?
일본의 중의원은 총 465명의 의석 중 지역구 289명, 비례대표 176명으로 구성됩니다. 비례대표가 전체의 38%입니다. 독일은 법정 의원정수가 598명인데 정당 득표율과 원내 의석 점유 비율을 최대한 일치시키기 위해 초과·보정 의석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2021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지역구 299석, 비례대표 437석으로 736명이 당선됐습니다. 비례대표 비율이 59%에 이릅니다. 뉴질랜드는 총 120석의 의석을 지역구 72석, 비례대표 48석(+ 초과의석)으로 배분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의 의석수는 상원 200석, 하원 400석인데 상원의 경우 지역구와 비례대표가 각 74석, 126석, 하원은 각 147석, 253석으로 구성됩니다.
우리나라가 채택한 혼합형의 비례대표 의석수는 전체의 16%에 불과해 소선거구제의 단점을 보완하기에는 턱없이 적습니다. 게다가 비례대표제도가 가지는 또 다른 순기능, 가령 사회적 약자나 소외계층, 전문가 등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측면에서 볼 때도 충분하지 않다고 봅니다.
북유럽의 주요 국가 의회는 2030 세대 청년 국회의원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데요, 노르웨이 34.3%, 덴마크 30.7%, 스웨덴 31.4%, 핀란드 29% 등입니다(IPU, 2021년). 우리나라는 3.7%에 불과해 100개 국가 중 107위이니 차이가 상당합니다. 문화나 교육 등의 측면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만, 이들 나라가 모두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요인입니다.
그렇다면 대표성, 비례성을 강화하고 청년 정치인 육성 등 새로운 정치문화의 토대를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비례대표 의석수를 늘리는 게 좋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이런 고민에 이르게 됩니다. 선거제도 개편 논의에서 비례대표 확대가 늘 쟁점이 돼 온 건 이런 문제의식에서입니다. 다만 명분이 있다고 해서 간단히 바꿀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비례대표를 확대하려면 국회의원 정수를 늘리거나, 국회의원 정수를 유지한 채 지역구 국회의원 수를 줄여야 합니다. 그런데 정수를 늘리기에는, 우리 정치가 자초한 일입니다만,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국민 신뢰가 너무 낮습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지난 2월 14일 공개한 '정치개혁 국민 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 57.7%가 정수 확대에 반대했습니다. 그렇다면 지역구 수를 축소하고 비례대표 의석을 늘리는 방안은요? 81.7%의 국민이 찬성한다고 밝혔습니다.
선거제도 전문가도 다수가 '지역구 축소, 비례대표 확대'에 공감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며칠 전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편과 관련된 전문가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됐는데(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2023.8.29.), 전체 응답자 489명 중 찬성자가 57%였습니다. 그러나 이 방안은 현재 의석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 최대 관건입니다. 딱 봐도 쉽지 않겠죠.
'지도부 마음대로 공천한다’라는 인식도 비례대표 확대의 걸림돌입니다. 1963년 '전국구 선거’라는 이름으로 처음 도입된 비례대표제는 당시 전체 의석의 1/4에 적용됐는데요, 군부 세력이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한 인사들을 배려하기 위한 차원이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지역구에 비하면 비례대표 공천은 지도부의 몫으로 더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거수기’라는 꼬리표를 갖게 된 안타까운 역사입니다.
현재와 같은 비례대표 제도는 1990년대 이후부터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지역구 선거에서 5석 이상, 유효투표 총수의 3% 이상의 정당을 기준으로 의석을 배분하는 방식이 적용된 건 1996년 국회의원 선거부터입니다. 2000년 총선에서 후보자의 30%를 여성으로 할당하게 되었고, 2004년에는 그 비율을 50%로 상향하면서 1인 2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습니다. 우리 정치에서 소수정당이나 여성의 원내 진출 기회가 확대되어 온 과정입니다.
"비례대표제는 합의를 이뤄내는 문화를 조성하고, 정당들이 국가 전체의 복지를 위해 이념적 경계를 넘어 협력하도록 장려합니다."
- 저신다 아던(Jacinda Kate Laurell Ardern) 뉴질랜드 총리, 2021년 영국 일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저는 전체 의석수를 늘리든 지역구를 없애든, 우리나라 정치의 양극화와 이념대결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의 하나로 비례대표 확대를 지지합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펼칠 때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사람 이야기입니다.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지역구에 도전하는 것보다는 여러모로 혜택이 많은 편입니다. 유권자들에게 이름을 알리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지역 활동을 안 해도 되니 사무실이나 사람을 구하는 데 돈이 들 일도 거의 없습니다. 선거인단 투표 등 제한적인 경쟁이 있더라도 연설이나 토론 등 준비과정이 단순한 편입니다. 전문가 출신이라면 '영입’ 케이스에 해당하죠.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내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일부 비례대표 의원들이 보이는 행태가 몹시 못마땅합니다. '명분 없는 지역구 사냥(2023.5.22. 동아일보)’, '지역구 출마 준비에…비례 의원 후원금 펑펑(2023.5.23. 채널A)’, '전략공천 지역구서 깃발 꽂는 비례 의원(2023.6.8. 서울신문)’ '꽃길만 걸으려는 비례 의원들(2023.8.24. 한국일보)’ 등 관련 기사의 제목만 보아도 내용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비례대표 의원들이 지역구에 출마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의정활동 경험을 살려 더 많은 공익적 활동을 위해 다시 선거에 나서려는 건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다만, 특정 지역의 선거를 준비하는 데 의정활동 후원금을 마구 쓴다든지, 당선 가능성이 큰 선거구에 출마하기 위해 지역 연고를 급조한다든지, 지도부와의 친분을 내세우며 비주류 의원의 지역구를 고른다든지, 경선이 없는 전략공천 선거구를 노린다든지 하는 치사한 일들만은 자제했으면 합니다.
선당후사까지 바라지는 않겠지만, '지역구의 손쉬운 우회경로’라며 비례대표 무용론을 펼치는 사람들에게 그 근거로 지목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https://n.news.naver.com/mnews/hotissue/article/002/0002298778?type=series&cid=200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