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성의 여의대교] 프레시안 칼럼, 다섯 번째 이야기
- 작성일2023/07/18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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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층이 당락 가를 듯", "중도 확장 전략 모색"….
선거 때가 되면 종종 듣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양대 정당은 평소 핵심 지지층만 바라보는 정치로 이념적 양극화를 부채질한다고 느껴집니다만, 선거가 가까워지면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승리를 위해서는 외연 확장이 절실한 과제가 되기 때문이죠.
엄밀히 말하자면 부동층과 중도층을 개념화하는 기준은 다릅니다. 각각 정치적 선택, 이념 성향의 측면에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정치를 대하는 태도나 투표를 결정하는 기준 등에서 비슷한 경향을 보여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기도 합니다.
부동(浮動)층은 종종 스윙 보터(swing voter), 무당층이라고도 합니다. 일관되게 선호하는 정치세력이 없고 상황에 따라 투표하는 유권자들입니다.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비율이 정당 지지층에 비해 높은 편입니다. 거대 양당의 고정 지지층이 아닌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 여기서부터는 무당층이라는 용어를 쓰려고 합니다.
1950년대 미국 미시간대학의 정치 과학자들은 ‘미시간 모델(The Michigan Model)’이라는 사회심리학적 접근법으로 투표 행동의 기본 이론을 정립합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특정 정당에 상당 기간 애착하거나 귀속되는 감정을 정당일체감(Party Identification)으로 개념화했습니다.
미시간 학파는 선거 이슈나 후보자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정당일체감을 투표를 결정하는 3대 핵심 요소 중 하나로 보았고, 어느 정당에도 일체감을 느끼지 않는 무당층은 일반적으로 정치적 지식이나 관심, 참여가 낮은 사람들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들을 '전통적 무당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들어 중대한 사건이 잇따르며 미국 정치는 격변의 시기에 접어듭니다. 시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히피 문화 확산 등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정당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는 급격하게 떨어지고 기성정치에 대한 회의감으로 무당층이 늘어납니다.
이제 '무당층은 정말 정치를 모르고 관심이 없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됩니다.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미디어가 발달하는 등 사회가 현대화하면서 정당일체감보다는 개인의 인지능력에 따른 정치적 결정이 늘어났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한 겁니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달톤(Russell J. Dalton)은 정당에 소속감을 느끼지 않더라도 높은 수준의 정치적 관여를 보이는 새로운 무당층이 등장했다고 분석했습니다. 과거에 비해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진 이들을 '인지적 무당층'이라고 구분하겠습니다.
흔히 '전통적 무당층 = 정치 무관심층(apolitical)'이라고 여기지만, 인지적 무당층은 일관되게 지지하는 정당이 없을 뿐 정치적 지식과 관심이 높아 투표할 가능성은 큰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거 결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캐스팅 보터(casting voter)가 바로 이들입니다.
무당층은 대개 선거 시기가 되면 늘어나고 선거가 끝나면 줄어드는 경향을 보입니다. 선택한 정당(후보)에 대한 실망감으로 지지를 철회하기 때문이죠.
최근 발표된 2023년 6월 첫째 주 한국갤럽 여론조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정당 지지도는 국민의힘 35%, 더불어민주당 32%, 무당층 27%입니다. 1년 전에는 어땠을까요? 2022년 6월 2일 현재 국민의힘 45%, 더불어민주당 32%, 무당층 18%였습니다. 지방선거 다음 날 조사입니다.
민주당의 지지도는 1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국민의힘 지지도는 10%포인트 줄고 무당층의 규모는 9%포인트 늘었습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국민의힘 지지층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무당층으로 이동한 겁니다.
6월 첫째 주 한국갤럽의 같은 조사에서 대통령의 직무수행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비율은 35%, 부정 평가는 57%였습니다. 무당층의 경우 긍정 22%, 부정 62%입니다. 1년 전 무당층의 평가(긍정 33%, 부정 35%)와 비교하면 현 정부를 둘러싼 여론환경이 좋지 않은 상황으로 분석됩니다.
내년 4월 국회의원 선거는 타이밍으로 보자면 윤석열 정부 2년을 거의 꽉 채운 시점에서 치러지는 중간선거(midterm election)입니다. 현직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성과 평가가 중심이 되는 '신임투표(referendum)' 성격의 선거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총선이 어떤 이슈를 중심으로 치러지게 될지 가늠하기는 아직 어렵습니다. 특히 경제 상황은 민심을 읽어볼 수 있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인데, 우리 국민이 윤석열 정부의 경제 운영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할 것인지 지금 전망하기는 좀 이른 감이 있습니다.
다만 국민의힘 지지도 하락과 무당층 규모의 확대, 대통령에 대한 부정 평가 증가 추세로 볼 때 현시점에서 정부·여당이 위험 신호를 받고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민주당 역시 여권에 비우호적인 여론에만 기대기에는 상황이 녹록지 않아 보입니다. 지지도가 1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는 건 윤석열 정부에 실망해 지지를 철회한 유권자가 제1야당을 대안 세력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신생 정당 앙마르슈(En marche. 전진)의 창당 주역인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프랑스 대통령은 취임 약 한 달 만에 치러진 2017년 총선에서 350석의 과반 의석을 확보합니다. 이전까지 의회에 단 한 석도 없던 정당이 총선에서 거대 여당으로 등장하는 대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앙마르슈의 성공 배경에는 공화당과 사회당이 양분해 온 기존 정당정치에 환멸을 느낀 거대한 무당층이 있었습니다. 새 정당이 내건 중도주의와 실용주의, 그리고 비(非)이데올로기적 접근에 대한 이들의 지지가 양당 헤게모니 해체의 기반을 형성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프랑스는 작년에 대통령 선거를 치렀는데, 1차 투표에서 공화당 발레리 페크레스(Valérie Pécresse) 후보가 4.78%, 사회당 안 이달고(Anne Hidalgo) 후보가 불과 1.75%의 득표율로 탈락하는 등 프랑스의 양당 독식 체제는 완전히 막을 내렸습니다. 오랫동안 프랑스를 지배해 온 거대 정당의 부패와 무능함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었습니다.
내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우리 정치권에서는 신당 창당이니 선거제도 개편이니 하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제껏 시도된 정치실험들이 양극화된 정치체제를 바꾸는 데 성공하지 못해 비관적 전망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양한 세력, 새로운 정치 문화의 등장을 또 한 번 기대하며 '똑똑한 무당층'의 선택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개딸', '전광훈'에 끌려가는 한국정치, 무당층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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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의 여의대교] 프레시안 칼럼, 네 번째 이야기